내가 다니던 고등학교가 예쁜 건물을 지어 이사를 갔다. 우리 집이 이사가는 것도 아니고 다니던 고등학교가 이사 가는 경험을 한 사람은 많지 않을 거다. 엄청 어수선한 일이 될 수밖에 없었지만, 예쁜 붉은 벽돌 새 건물과 뜻밖의 편의 시설들을 사용하게 된 건 참 좋았다. 그중에서도, 다른 학교에는 없는 자습실이 구비되었는데, 이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좀 애매하지만 하여간, 그냥 수업을 받던 원래 교실에서 자습을 이어가던 다른 학교들과 달리, 우리 학교에서는 수업이 끝나면, 기분전환(?)을 할 수 있었다. 칸막이 좌석이 끝도 없이 이어진 거대한 자습실로 이동해서 말이다. 수백 명이 한 공간에서 각자 공부를 하는 것이다.
배철수의 음악 캠프 첫 방송을 들었던 건 자습실로 이동하는 복도에서였다. 교실에서 수업이 끝나면, 나는 소형 라디오를 켜고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주파수는 재미있는 방송을 찾아 이리저리 옮겼지만 대체로 에프엠 음악 방송을 들었다. 그날도 여섯시에 팝송이 나오는 채널로 주파수를 돌렸는데, 배철수 아저씨가 특유의 인트로 음악을 틀면서 첫 인사를 하고 있었다. 귀가 꽝꽝 울리도록 음량을 키우고 좌우에 창이 난 복도, 공중 다리를 지나 자습실로 가는데, 전율이 일었다.
지금도 라디오를 진행하는 배철수. 요즘도 청취율 1위인지는 모르겠지만 늘 광고가 많고, 광고를 내보내기 전에는 협찬사의 이름을 하나하나 정성스레 부르는 디제이. 그가 '전하는 말씀'을 최초로 '광고'라고 고쳐부른 순간을 기억한다. 어떤 청취자의 사연 때문이었다. 그는 배철수가 '가장 자주 하는 말' 베스트 10 같은 걸 꼽으며 은근히 비꼬았고, 그후 배철수는 "전하는 말씀 듣겠습니다" 대신 "광고 듣겠습니다"라고 당당히(?) 말하기 시작했다.
연애가 생중계되었던 방송이라는 점도 업적이 되려나? 한동안 그렇게도 여성 피디에게 말을 걸고 언급하고 하더니 끝내 결혼했다는 뉴스를 보고 얼마나 웃었던지. 담백하면서도 재치있던 언변, 기획력이 돋보이던 수많은 코너들, 한때 많이 웃었던 임진모 구박. 그저 귀로 한 번씩 들었을 뿐이지만 생생하게 기억 나는 순간이 꽤 많다. 마치 광경도 눈앞에서 떠올릴 수 있을 것 같은 친근함이다.
이제는 라디오 방송에서 디제이라는 명칭을 더 이상 쓰지 않는 시대지만 아직도 시디 플레이어를 고집하며 직접 음악을 선곡해서 튼다는 배철수. 또한 백퍼센트 청취자 신청곡만 튼다던 자부심. 수십년째 그 원칙이 지켜지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제는 가끔 자동차를 탈 때만 듣게 된 라디오 프로그램이지만, 그 어마무시한 세월의 역사가 아직도 참신하게만 느껴지는 희귀한 올드 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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