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문과 출신들이 많은 대학원에 다닌 적이 있다. 나의 동기이자 친구가 된 그녀들은 영문과를 떠나 다른 대학원에 진학을 했으면서도 여전히 영문과와 관련된 이야기를 많이 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상황이지만, 그때마다 난 새삼스럽다는 생각을 하면서 관심 있게 듣곤 했다.
그중 하나가 영어 교육 분야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그녀들 주변에는 당연히 전공을 십분 살려서 그쪽으로 진출한 사람이 많았던 것이다. 그중 제일 부러움을 사는 사람들이 영어 방송(아리랑티비)이나 영어 교육 방송(EBS라디오)에 출연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녀들은 여전히 그런 방송을 자주 듣고 보며 조금이라도 더 영어 공부를 하려 애쓰는 듯했다.
그녀들 사이에서는 그런 방송 출연자들이 스타였다. 집에 가면 아리랑티비를 틀어놓고, 학교를 오가면서는 EBS라디오를 듣는다면, 거기 나오는 방송인들을 선망하고 친근감도 가지게 될 수밖에 없다. 지인들을 통해 개인적 이력이나 소문도 알게 되면 더 그럴 수밖에 없고 말이다.
실은 점점 나도 영어 교육 방송을 즐겨 듣게 됐다. 요즘도 그럴 테지만 당시 EBS 라디오에서는 아침과 저녁으로 영어 회화에 도움이 될 프로그램들이 흘러나왔다. 어느덧 나는 음악 방송의 세계를 떠나 실용적인 방송, 아니 자기 계발 방송을 찾게 된 것이다. 생각해 보면 이때부터 음악 방송을 점점 듣지 않게 된 것 같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기가 있던 방송은, 출근 시간대에 하는 ‘영어 시사’ 프로그램이었다. 한국인과 영어 원어민 둘이서 진행을 하며, 영미권 뉴스를 들려주고 해석해주고 ‘구문 연습’도 시켜주었다.
그런 영어 교육 방송에 나오는 스타(?)들이 어느 카페에 출몰한다더라, 누구랑 만난다더라 하는 가십을 유난히 자주 입에 올리던 한 친구가 있었다. 학원에서 활약하던 누구의 인기가 심상치 않다고 하더니 그가 어느새 학원계를 떠나 방송에 등장하고 있어서 신기했던 적도 있다. 한 번은 하루 아침에 교체돼 버린 방송인이 사기 사건에 연루되어 잠수를 탔다는 의혹을 들려주어 더욱 흥미진진하기도 했는데,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그렇게 한 3년 열심히 들었다. 그러나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쳐 돌아가는 직장 생활을 시작하면서는 거의 들을 새가 없았다. 가끔 출근길에 라디오를 듣기도 했지만, 방송 내용은 나의 복잡한 머릿속을 그냥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한참 시간이 흐른 뒤, 우연히 다시 영어 교육 방송을 들었을 때, 너무 느리고 쉽게 들려서 한바탕 격세지감(!)을 느끼는 감회에 젖기도 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꾸준히 영어를 쓰는 업무를 했더니, 나도 모르는 새에 익숙해졌나 보다. 대학원 때 처음 듣기 시작했을 때는 반도 못 알아듣겠더니 말이다. 세월을 헛살지 않은 증거가 몇 가지 없는데, 영어 실력이라도 늘어서 다행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때의 추억의 방송인을 우연히 마주친 일도 있었다. 방송을 열심히 듣던 대학원 때로부터 꽤 오랜 세월이 흐른 후였다. 어느 식당에 갔는데 우연히 앉은 자리에서 바로 뒷자리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거였다. 어설픈 한국어, 영어를 섞어서 말하는 방식, 익숙한 목소리. 바로 그분이셨다. 나와 마주 앉은 일행도 끊임없이 수다를 떨고 있었는데, 사실 그다지 관심없는 내용이어서 지루하던 참이었다. 내 청각은 온통 뒷자리로 향했다.
그분은 무려 이별의 고통에 대해 말씀 중이었다. 자신의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도, 자신의 이야기를 엿듣는 사람도 없으리라 그렇게 확신했던 걸까. 추억에 휩싸여 우연한 만남의 감격에 휩싸여, 나의 스타의 사생활을 생생히 듣는 기분은 정말 묘했다.
다행히 나와 일행이 나갈 때까지도 자리에 그대로 앉아 계서서, 슬쩍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분도 많이 늙었더라. 아마 길에서 마주쳤어도 알아보지 못했을 듯했다. 하지만 라디오를 통해 3년 내내 매일 듣던 목소리만은 즉시 알아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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